마음은 단순하다.
의도보다 앞서 마음이 움직인다.
앞으로 좋아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전에,
‘저것은 싫은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마음의 방향을 정해버린다.
미움도 단순하다.
상처 준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미워하겠다는 다짐도, 미운 것에 대한 정의도
생겨나기 전에,
순간적인 수치심과 자괴감, 속상함, 증오심이 곧바로 미움으로 연결되어 버린다.
하지만 미움은 복잡하다.
싫은 것이지만 싫기만 한 것은 아니고
화해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냥 잘 지내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미움이다.
그리고 그 미움의 대상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해하고 싶어진다.
용서가 아니다.
그가 잘못한 지점을 물고 늘어져 끝내 사과를 받거나 혹은 대인배로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의 행동을 곱씹으며, 그리고 내가 숨겨둔 나의 마음에 되물으며
이해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를 완전히 이해했을 때,
하지만 관계를 되돌릴 기회를 이미 놓친 이후임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그 시간을 아주 오래 붙들고 살아간다.

해무그룹 감사팀장 주인아는 그런 사람이다.
마음 가득 미워하고 싶을 때, 미워할 수 없게 사라져 버린
주인아에게 엄마는
사랑하면서도 부끄러운 존재였다.
엄마의 불륜으로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 엄마를 평생 외면하는 아빠를 둔 사람, 그게 주인아였다.
어릴 적 단 한 번 마주했던 기억 속에서도
아빠는 어린 주인아를 보호하기보다
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며 엄마를 몰아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인아는 불륜이 싫었다.
누군가의 삶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관계.
사람 하나를 평생 숨어 살게 만드는 관계.
자신과 엄마를 이렇게 만든 원인.
그러니까 주인아에게 ‘불륜’이라는 것은
엄마를 평생 죄인처럼 숨어 살게 한 족쇄.
엄마의 삶이 안쓰러운 이유.
하지만 주인아는
살아보려는 엄마의 발버둥을 맨눈으로 목격하고
엄마를 미워하게 된다.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그리고 마음이 후련해진다는 이유로,
미술 학원에서 누드 모델로 일하는 엄마가 미웠다.
길에서 우연히 엄마를 마주쳤을 때,
옆에 있던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엄마의 일탈인지, 일상인지,
그것이 친구 앞에서의 주인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평생토록 불쌍한 피해자로 여겨온 엄마가
‘원래 그런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억울하게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적나라한 시선을 알고서도 부적절한 관계를 기꺼이 선택한,
‘원래 그런 사람’.
남들 앞에 알몸으로 서서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딱지가
사랑하는 엄마를
안쓰러운 엄마를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에 버림받은 엄마를,
‘상간녀’로 바꾸어버렸다.
주인아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엄마를 찔렀다.
이제 보니 아빠가 엄마를 버린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엄마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그리고 그 말은
엄마의 삶을 향한 비난인 동시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공포이기도 했다.
엄마와 같은 자리, 엄마를 이해하는 한 바퀴
주인아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죽었다.
오지 않는 딸을 밤새 춥게 기다리다
이번에도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거니,
마음을 접고 돌아가던 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남겨진 딸은
엄마 대신 누드모델 자리에 서게 된다.
처음에는 수치스럽고 불쾌했다.
남들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
시선 속에 자신을 세워두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을 감싼 가운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그려내는 수많은 눈을 향해
한 바퀴 돌아섰을 때,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왠지 후련해진다는 말.
남들에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순간의 해방감.
주인아는 그제야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더 이상 숨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하지만 이해의 순간이 너무나도 늦었다.
이미 엄마는 죽었고,
주인아는 사과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주인아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마저도
언제나 먼저 놓아버리는 쪽에 가까워진다.
사랑을 지키고, 나를 지키기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재벌가의 도련님이었고,
하필 그리 귀하지 않은 도련님이어서,
주인아는 그를 지키겠다 다짐한다.
5년을 만난 끝에
그에게 정략결혼의 순간이 다가오자,
주인아는 미련 한 톨 보이지 않고
그를 떠나간다.
그가 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 결혼은 필요하고
자신은 필요 없으니.
버려지는 것보다
버리기를 택했다.
엄마와 다르게.
결혼 이후에도
어물쩍 자신과의 관계 유지를 바라는 상대를 피해
해외로 나갔다.
한국에 남아 불륜으로 오해받고
낙인찍히는 불상사를 겪고 싶지 않았다.
불륜이 어떤 것인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아니까.
사랑하는 이의 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까지 함께 지키는 일,
그것은 완전한 이별이었다.
미움
그렇다면 주인아는 엄마를, 그를,
원망할까.
어린 제가 불륜이 무엇인지 깨우치게 한 엄마를,
그리고 그런 저를 다시 불륜이라는 관계에
이번엔 주체로 세워두려는 그를,
주인아는 과연 원망할 수 있을까.
주인아는 그저,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미워할 뿐이다.
생각보다 많은 애정과,
생각만큼 크지 않은 증오를 품고서
상처받기가 두려운 자신을 방어해 가며,
상대를 꾸준히 미워하고
이해의 순간이 다가오면 이해하기를 유보하며
사랑했던 이와의 끈을 놓아버리는 일은 끝내 하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