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수와 재희는 친구다. 그런데 이 문장을 쓰고 나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친구. 맞는 말이긴 한데, 이 단어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나면 그 물음이 계속 남는다.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리고 왜 우리는 그것을 어렵게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흥수는 게이다. 재희는 그것을 알고 그와 친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이성애적 긴장은 처음부터 없다. 재희는 극 중에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흥수는 그 이야기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듣는다. 그러니 이 관계를 두고 연애 감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혼동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 관계가 연애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두 사람은 연인이 공유할 법한 것들을 나눈다.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 상대의 가장 나쁜 순간을 곁에서 본다. 재희가 흥수의 자취방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는 장면, 흥수가 재희의 귀찮은 연락을 끊지 못하는 장면, 서로의 연애가 실패할 때 가장 먼저 전화하는 사람이 상대인 장면 — 이것을 우정이라고 부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정이라는 단어가 이 밀도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관계보다 이 둘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서로에게 허락하고 있다. 더 많은 시간을, 더 많은 취약함을, 더 많은 실망을.
그 과잉 친밀성에 이름이 없다.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우정의 범위 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관계의 언어는 대부분 두 가지 축 위에 놓여 있다. 가족이거나 아니거나, 연인이거나 아니거나. 그 축 바깥에 있는 관계를 우리는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언어가 없으니 관계도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불안정하게 느껴지니 빨리 이름을 붙이려 한다. 이름이 생기면 관계가 안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이름은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통제하는 도구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관계는 그 이름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고, 그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면 실패로 규정된다.

흥수와 재희는 그 실패를 거부한다. 이 관계가 뭔지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친밀한 순간들을 클로즈업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 관객이 스스로 해석하도록, 그리고 스스로 그 해석의 한계를 느끼도록 내버려 둔다. 영화는 이 관계를 문제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이 이름 없이도 서로에게 충분히 존재하는 방식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불편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 관계를 어딘가에 분류하고 싶어하는 우리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 설계되어 있다. 질문 자체가 모든 남녀 관계를 잠재적 연애 서사의 후보로 놓는다. 흥수와 재희는 그 서사의 바깥에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의 언어로 두 사람을 이해하려 한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가진 관계의 언어는 왜 이렇게 좁은가. 왜 우리는 연애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우정도 아닌 관계를 만났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반드시 무언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는가.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답 대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뒷모습 앞에서 비로소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이름 없이도 충분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아직 믿지 못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