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교복, 다른 시간 : 〈응답하라 1997〉, 〈상속자들〉

교복을 입으면 그때부터 어른이 된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셔츠에 넥타이를 맨 TV 속 언니 오빠들의 삶이 이미 어른의 시간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셔츠에 넥타이, 한쪽 어깨에 걸친 가방.
노는 것도 싸우는 것도 왠지 멋있어 보였고,
삶의 기로에서 깊이 고민하다 하나의 결론을 내고 전진하는 모습은
어린 눈에 이미 완성된 어른들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나도 교복을 입을 나이가 되면
그만큼 어른스러워지고 멋있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나이는 어른스럽고 멋있는 나이가 아니라,
어른이고 싶고 멋있어지고 싶은 나이이며,
동시에 매우 서툴지만, 그 누구보다도 찬란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시간을 살아가는 청춘들을 보여준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1997>, 그리고 <상속자들>

 

 

서툴지만 충실한 열정 :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면 전국구에 소개가 되는, 그야말로 문학소녀.
그렇지만 문제를 말로 해결하기보다는 행동이 앞서고,
시험만 봤다 하면 꼴찌인 교과성적과 달리 체력장은 늘 앞에서 1등인,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무대뽀.

충실하게 가슴이 시키는 일만 하는 아이.
그가 바로 부산 광안고의 성시원이다.

그리고 성시원의 가슴은 H.O.T 앞에서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반응한다.

 

말 그대로
성시원의 열여덟엔 “오빠들”뿐이었다.

하지만 성시원의 가슴은 단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만을 시키지 않는다.
H.O.T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을 쓰고, 직접 자수를 둔 인형을 선물하고, 공개방송 녹화를 따라다니며,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기도 한다.

주변에서는 그런 시원을 못마땅해한다.
그들은 몰던 거다.
성시원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가슴이 시키는 대로 착실히 움직인 성시원 앞에
뻥 뚫린 하나의  길이 나타날 줄은.

좋아하는 것을 따라 움직인 시간은
결국 성시원을 오랜 꿈이었던 방송작가의 길로 이끈다.

그야말로 좋아하는 것을 성실히 좋아해 온 성시원의 승리다.
학업에 뒤쳐질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한 번 뿐인 10대를 가장 찬란하게 보낸 성시원이기에 맞이할 수 있었던 미래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쓸모없는 일이라 여기지 않으며,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결국 그 마음에 보답받는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우습지 않으니까.
그 마음이 분명 누군가를 행복하게 했을 테니,
이제는 내가 행복할 차례가 온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청춘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만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억눌린 시간의 끝 : 처음으로 돌아갈 용기


탄탄한 뼈대의 가문은 이효신에게 명예와 힘이라는 옷을 입혔다.
하지만 효신에게 무겁기만 한 명예와 부담스러운 힘은 마냥 달갑지 않다.
효신이 힘을 가진 만큼, 효신에게 겨눠진 힘 역시 효신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큰맘 먹고 시도한 몇 번의 작은 반항은
너무나도 사소했던 나머지
효신의 가슴을 겨두던 힘조차 그저 묵인해 주었다.

 

경기고가 아닌 제국고를 택한 것이 첫 번째 반항이었고
방송부에 들어간 것이 두 번째 반항이었다.

효신이 할 수 있는 반항은 그 정도였다.
그가 거스를 수 있는 삶의 범위는 딱 그만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반항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효신이 아무리 제 삶에서 엇나가고 해방되려 발버둥 쳐도
그 이유조차 묻지 않는 가족은 꽉 닫힌 독방처럼 효신의 숨을 조였다.

효신이 마음먹고 만들어 낸 몇 번의 균열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철벽과도 같은 압력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깨닫게 할 뿐이었다.

가문이 정해 둔 길은 여전했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 법대에 진학하는 것,
가문의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

무수한 ‘해야만 하는 것’들이
효신의 앞을 거대하게 지키고 있었다.

효신의 시간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억눌린 마음은 언제까지나 조용히 버텨주지는 않는다.
연약한 효신의 마음은 주위의 압력에 점점 구부러지고, 쪼그라든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벽에 갇힌 풍선처럼,
결국 확실히 터져버릴 순간을 기다리며 조용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해야만 하는 것들 사이를 조금 비집고 들어간
단 하나의 ‘하고 싶은 것’.

고등학교 3학년, 효신은 아시아 청소년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고 수상했다.
‘하고 싶은 것’에 손을 뻗어본 경험.

하지만 그 경험 하나로 효신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잠시 숨 돌릴 틈을 얻었지만, 다시 숨 막히는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효신은 수능도, 대학도 포기하고 도망칠 결심을 했다.
자신을 억압하는 집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리를 일삼는 가족조차 손 뻗지 못하는 곳으로.
내 삶을 찾기 위해서.

거기서부터 시작인 것이다.

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 찼던 시간을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향해 내딛는 삶.
효신의 삶은 처음으로 돌아가, 이제 시작되었다.

 

 

같은 교복, 다른 시간


교복을 입은 나이는
가장 찬란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나이다.

현실의 벽쯤은 모른 체하고,
하고 싶은 것만을 열심히 쫓고 싶은 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리고 열정적인 마음을 쉽게 꺾어서는 안되는지도 모른다.

한 번 꺾인 마음은
접힌 상처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다시 꼿꼿이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될 뿐이다.

어떤 청춘은 성시원처럼
하고 싶은 것을 향해 마음껏 달려나가고
또 어떤 청춘은 이효신처럼
해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움츠린 채 버틴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은
언젠가 ‘하고 싶은 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딛기 위한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은 전혀 달랐다.

모든 청춘이
서로 다른 삶 속에서도
부디 세상의 싱그러움을 잊지 않기를.

교복을 입고 꿈꾸던
그 찬란한 세상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응답하라, 너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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