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지워야 했던 이름과 새겨야 할 이름 사이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시인하는 행위다.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읊었듯,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그 존재는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지워야만 했던 낙인이자, 70여 년의 세월 동안 차가운 침묵 속에서 매몰되어 있던 증언이기도 하다.

 

 


 

 

올해 4월에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내 이름은>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시린 비극 중 하나인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 영화는 1998년을 배경으로, 자신의 이름인 ‘영옥’이 촌스럽다며 개명을 꿈꾸는 18살 소년의 사소한 불만에서 시작된다. 이어 평생 자신의 진짜 이름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어야 했던 어머니 ‘정순’의 거대한 비극으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이름이라는 사적인 기표를 통해 찾아가는 기억

주인공 정순은 봄에 바람만 불면 픽픽 쓰러지는 이상한 질병을 앓고 있다. 약을 얻기 위해 병원으로 찾아간 정순은 서울에서 올라온 새로운 의사 선생님, 희라를 만나게 된다. 희라와 정순은 이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기 위해 잃어버린 정순의 기억을 되짚어 간다. 그 과정 중, 정순은 이 기억상실과 발작이 과거 트라우마에 의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고 1940년대 속 잊고 싶었던 기억들을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공사장의 굉음이나,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등등 정숙이 일상적인 것들을 접할 때 일으키는 발작은 1948년 제주에서 들렸던 총소리나 도망치듯 빠져나온 보리밭에 대한 트라우마로 다시 치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정순의 트라우마를 단순히 과거의 비극으로 회상처리 하지 않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일상 속에 과거가 침입하는 방식을 사용하며 생존자들의 삶이 현재까지도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를 나타낸다. 또 정순이 항상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는 과거의 진실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를 의미한다.

 

 

“엄마, 이제 엄마 이름으로 살아갑서”

사실 주인공 정순의 실제 이름은 ‘영옥’이었다. 4.3 사건 당시, 정순은 토벌대를 피해 살아남아야 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모두가 잡혀가고 혼자 남겨진 혼란 속에서 군장부의 딸이자 친구였던 정순이 죽게 된다. 영옥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죽은 친구의 이름인 ‘정순’을 빌려 살아간다. 당시 제주에서는 일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 또한 많은 죽음을 당했기에 어린 영옥에게 군장부의 딸의 이름인 ‘정순’은 그녀에게 생존을 위한 가면이자 앞으로의 삶을 괴롭히는 감옥이었다.

“왜 아들 이름을 영옥이라고 지으셨어요?” “그냥 가장 먼저 떠올랐어”

자신은 평생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부정해야 했지만 아들만큼은 자신이 잃어버린 ‘진짜 존재’로서 당당히 살아가길 바랬던 것일까? 정순은 영옥으로서 살지 못했던 지난 날들을 아들에게 전해준다.

 

 

 

현세대와 과거의 교차 속 숨어있는 의미: 폭력의 대물림

영화는 정숙에게만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아들 영옥의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영옥은 반에서 주도권과 힘을 가진 경태에 의해 반장이 된다. 그는 경태를 비롯한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방식에 동조하고 잘못된 일들을 묵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들 영옥은 정숙과 다르게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떳떳이 살아가기 위해 용기를 낸다. 일탈을 일삼고 친구들과의 사소한 갈등조차 폭력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권력세력에 반항하기 시작하며 학급의 질서를 바로 잡는다. 이는 어린 시절, 과거 영옥이 하지 못했던 과오를 현세대의 영옥이 바로잡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준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자신이 차마 누리지 못했던 인간으로서의 실존이었던 것이다. 아들 영옥이 여성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하다가 그게 엄마의 진짜 이름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은 현 세대가 잊으려 했던 과거의 상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숭고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내 이름은>은 단순히 우리의 슬픈 과거를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비극의 생존자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러닝 타임 내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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