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참가를 원하십니까?”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은 이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이 질문만큼 허구적인 것이 없다. 작품은 겉으로는 게임, 경쟁, 선택의 구조를 띠고 있으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정함은 물론 자유 의지조차 성립하지 않는 세계가 펼쳐진다. 〈오징어게임〉은 인간이 처한 조건의 불평등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공정하다’고 믿어온 규칙과 제도들이 사실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잔혹한 거울이다.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자유 의지라는 착각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는 투표 시스템이다.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정은 겉보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자유의지가 성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공정한 선택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숨긴 채 작동한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빚, 도박, 차별, 빈곤, 고용 불안, 이민노동자로서의 취약성 등 사회적·경제적 압박에 몰려 있다. 그들에게 ‘게임을 선택할 자유’란 실은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절망의 자유다.
이 지점에서 존 롤스의 말이 떠오른다.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불평등하다면, 개인의 자유는 형식적 자유에 불과하다.”
게임을 떠나는 선택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 따라서 자유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자유는 없다. 〈오징어게임〉이 보여주는 자유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종 미화되는 ‘선택의 자유’가 사실은 구조적 강제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임을 증명한다.
공정한 게임이라는 환상, 출발선이 다르면 경쟁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규칙,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경쟁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지나온 삶의 거리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고령의 노인, 도박 중독자, 빚더미에 오른 자영업자, 회사에서 버림받은 노동자,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이민 노동자—그들은 이미 출발선이 서로 다르게 설정된 채 게임에 진입한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등장한다. “출발선마저 다를 때, 경쟁은 과연 공정한가?”. 롤스는 이 지점을 “기회 평등의 허상”이라고 불렀다. 그는 말한다. 기회의 평등이란 단지 형식적 선언일 뿐이며, 실제 사회에서는 부모의 소득, 교육 자원, 문화 자본, 사회적 네트워크 등이 이미 아이들의 출발선을 결정짓는다.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이 ‘같은 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 룰이 처음부터 불평등 위에 서 있는 구조물이라는 점을 은폐한다. 따라서 게임의 공정함은 착시이며, 경쟁은 애초에 정의롭지도 않다. 그들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라는 경사 위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VIP들의 시선: 불평등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세계
작품 후반 등장하는 VIP들은 오징어게임의 잔혹성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그들은 참가자들의 고통을 ‘재미’로 소비하는 소비자이며, 죽음조차 하나의 놀이가 되는 세계의 구조를 체현하는 존재다. 이 장면은 많은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하지만 현실에서 불평등은 이미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고 있지 않은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서민의 절박한 사연은 소재가 되고, 극단적 생존 상황은 서바이벌 장르로 상품화되며, 부의 과시는 시청률을 높이는 콘텐츠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VIP들은 단지 오징어게임 세계의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존재시키고 있는 구조의 확대된 초상이다. 〈오징어게임〉은 그 잔혹성을 통해 “불평등은 누군가에게 참혹한 생존의 문제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관람거리일 뿐이다.” 라는 현실을 드러낸다.
입시·취업 경쟁은 오징어게임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시청자는 오징어게임을 ‘극단적인 설정의 허구’로 받아들이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현실의 경쟁 구조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한국의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승진 경쟁 역시 겉으로는 공정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경쟁 또한 출발선이 다르게 설정된 채 진행된다. 누군가는 사교육을 받고, 해외 경험을 쌓고, 풍부한 사회·문화 자본을 축적하며 성장한다. 다른 누군가는 생계 때문에 공부할 시간을 잃고, 가정환경 때문에 정보조차 얻지 못한 채 출발선에 도착한다.
룰은 같다.
조건은 다르다.
결과는 이미 예측되어 있다.
롤스의 말처럼,
“기회 평등이 말뿐일 때, 정의는 실패한다.”
오징어게임이 충격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의 경쟁이 실제로 얼마나 게임과 닮아 있는지, 그 극단성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이 보여주는 정의, 룰은 누가 만드는가?
롤스의 정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지의 베일’이다. 자신의 신분, 능력, 조건, 유리함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의 규칙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누구든 불리해질 가능성을 고려해 ‘진짜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오징어게임에서 규칙은 참가자가 아니라 VIP와 운영자, 즉 이미 상층에 있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자기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만든 룰이 과연 공정할 리 없다. 이 세계에서 정의란 없다. 있는 것은 단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만든 규칙일 뿐이다.
〈오징어게임〉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래서 더욱 선명해진다. 불평등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룰,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진행되는 경쟁,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자유. 이 모든 것이 모일 때, 공정함은 존재할 수 없다.
작품은 현실보다 잔혹하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오히려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택의 자유는 항상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선택을 둘러싼 구조가 공정하지 않다면 자유는 허상에 불과하다. 경쟁은 공정한 듯 보이지만, 출발선이 불평등하다면 경쟁은 폭력이다.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은 허구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극단적 버전이다.
그래서 〈오징어게임〉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이 게임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세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