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흥행과 클리셰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미뮤엔토 에디터 1기 허시원입니다.

이번에는 현재 1400만 흥행 영화인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수양대군과 단종에 집중하기 보다 유배된 단종과 그 마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립니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영화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단종에게 연민을 느끼며, 기어이 유배지까지 직접 찾아가 보게 만드는 것일까요?

극심한 영화 침체기 속에서도 어떻게 1,400만 관객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왕과 사는 남자>의 클리셰적 요소들이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클리셰는 이야기에서 예상가능하게 많이 쓰이는 요소 혹은 플롯을 말하는데

클리셰는 판에 박혀 진부함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이입하기도 쉬운 설정이기 때문에 많이 쓰입니다.

즉, 1,400만 흥행의 진짜 이유는 어쩌면 클리셰가 만들어낸 ‘낮은 진입장벽’ 덕분일 것입니다.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익숙한 플롯 덕분에 모든 세대가 무리 없이 이입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된 것이죠.

 

 


 

 

줄거리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유해진)는 양반이 유배 온 마을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엄흥도의 야심 찬 계획은 일반적인 양반이 아닌,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박지훈)를 맞이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이홍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했던 엄흥도.

하지만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어린 왕을 곁에서 지켜보며, 엄흥도는 점차 그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많은 노력 끝에 엄흥도와 이홍위는 서로 마음을 열게 되고

광천골 마을 사람들과 단종 간의 친구 같으면서, 스승과 제자이면서, 부모 자식과 같은 관계가 생겨납니다.

단종은 태어나 처음으로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힘없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위기에 처한 마을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 것이죠.

결국 그는 편안함을 뒤로한 채 다시 한번 왕권을 되찾기로 먹습니다.

그러나 엄흥도와 이홍위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왕권을 다시 찾으러 가는 길을 함께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단종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확실한 선악의 관계

 

영화는 굳게 닫혀 있던 단종의 마음을 차근히 열어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마치 한 편의 힐링물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풍경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단종을 폐위시킨 핵심 권력자, 한명회(유지태)입니다.

한명회는 작중 엄흥도에게 단종이 다시금 왕위에 오르지 않게 지속적으로 단종을 지켜보라고 시킨 사람이었으며,

단종이 마을에서 얻은 애정을 통해 그의 몸과 마음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되고

계속해서 단종을 압박하고 그 스스로의 처지를 자각하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영화는 단종을 품어준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을 선(善)으로,

수양대군의 사람들을 악(惡)으로 뚜렷하게 대비시키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경계를 허무는 ‘갭 차이’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단종은 깊은 죄책감에 짓눌려, 유배지에 와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가 계속해서 자살시도를 했으며, 이를 엄흥도가 막게된 것입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이홍위의 딱함을 이해하고 그가 마음과 몸이 건강해지길 빌며,

그를 위해 매일매일 자신들의 노력과 애정이 깃든 밥상을 한가득 올립니다.

그러나 이홍위는 살아갈 희망도 없었기에 밥조차 먹을 수 없었고

그런 마음을 누군가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매몰차게 그들의 따듯한 밥상을 내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산책을 나선 단종을 보고 엄흥도는 그가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줄 착각해 사색이 되어 그를 찾아 헤맵니다.

절벽 근처에서 단종을 발견한 엄흥도는 난생처음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냅니다.

왕이라는 위치 때문에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날 것의 꾸지람을 들어본 적 없던 단종 역시 크게 놀라고 맙니다.

그렇게 단종은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즉, 많은 노력 끝에 마을 사람들과 엄흥도는 투박하지만 그 투박함에서 느껴지는 정과 애정은 차갑게 굳은 단종의 마음을 녹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소위 말하는 갭차이를 단종에게 심어주어 사람들이 단종에게 더욱 몰입하고 그를 이해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늘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화려하게 꾸몄을 때 느껴지는 신선함이나, 경계심 많던 동물이 마침내 마음을 여는 순간의 벅참처럼 말이죠.

이처럼 캐릭터의 ‘반전 매력(갭 차이)’ 관객이 단종이라는 인물과 서사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가장 애틋한 죽음의 클리셰

캐릭터의 죽음은 극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확실한 클리셰입니다.

특히 관객이 깊이 정을 붙인 인물의 죽음은 엄청난 상실감과 슬픔을 안겨주죠.

이 영화에서는 그 죽음의 슬픔이 더 증폭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단종이 선택한 죽음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엄흥도는 단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 자신만의 목숨을 넘어 한 마을의 목숨이 떨어질지도 모를 위험한 길, 단종이 다시 왕위에 오르는 여정을 같이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붙잡히게 됩니다.

붙잡히는 때 단종은 엄흥도가 ‘지속적으로 한명회의 편이었으며 단종 자신을 속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연기하며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이를 모를리 없는 엄흥도는 처절하게 울음을 삼키며 자신의 길의 책임을 지는 단종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구금된 단종에게 수양대군파들은 사약이라는 죽음을 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종은 그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되는 것은 한 때의 왕위를 잇던 피로써 모욕적이고 자신의 선대를 욕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약을 마시고 죽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다며 엄흥도에게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단종에게 있어 가장 믿고 의지했던, 가족과도 같은 엄흥도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단순한 끝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하게 죽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에게는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준 이와 함께 걷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단종은 마을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준 뜻깊은 활을 매개로, 엄흥도의 손에 의해 강을 건너게 됩니다.

 

 


 

 

수미상관

단종이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과 그 방식 자체도 엄청난 슬픔을 안겨주지만,

이 영화가 그토록 짙은 후유증을 남기는 진짜 이유는 바로

결말부에 숨겨진 완벽한 ‘수미상관’의 연출에 있습니다.

 

 

 

단종이 처음 청령포로 유배를 올 때, 엄흥도는 그를 뗏목에 태워 강을 건너게 돕습니다.

거센 물살에 뗏목이 부서지며 혼비백산하는 이 장면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했으나 속은 이미 죽어있는 단종을 엄흥도가 처음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동시에 이는 결말부의 먹먹한 수미상관을 위해 시청자들이 기억하기 쉽게 설계된 극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결말부에서 엄흥도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준 활(밧줄)을 이용해 단종의 숨을 거두게 돕습니다.

놀랍게도 이 슬픈 죽음의 순간, 카메라에는 단종의 모습이 직접 담기지 않습니다.

방의 창호지 구멍 밖으로 이어진 밧줄을 엄흥도가 잡아당기는 장면으로만 그의 죽음을 표현하는데요.

계속해서 엄흥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강을 건널 시간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처음 유배지로 올 때 거센 강물 속에서 밧줄을 끌어 단종을 ‘살려냈던’ 마을 사람들과 엄흥도는,

역설적이게도 다시 한번 밧줄을 당겨 단종을 죽음이라는 새로운 강 건너편으로 인도합니다.

단종에게 이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자신에게 처음으로 행복을 알려준 이의 손을 거쳐 새로운 안식처로 향하는 과정으로 그려집니다.

즉, 이러한 숭고한 모순 덕분에 이 마지막 장면은 단종을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해 주는 구원의 순간이자,

더는 그를 볼 수 없다는 뼈저린 애도의 시간이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클리셰적 요소를 통해 <왕과 사는 남자>를 살펴보았고

이 것이 바로 흥행을 가능하게 했던 흐름이라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맨 처음 말했듯이 클리셰는 무리 없이 이입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게 할 수도 있고,

진부하고 뻔하게 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이 클리셰가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 영화 최고의 흥행 비결은 무엇인가요?

 

저와는 또 다른 여러분만의 신선한 해석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미뮤엔토 에디터 1기 허시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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