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감각하지 못한다.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곁에 있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많이 희생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에게도 똑같이 향하는 그 질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잊고 지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대개 내가 주는 사랑을 먼저 떠올린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다고,
그 마음만 인지한다.
그림자가 된 엄마, 엄마의 그림자
<하이바이, 마마!>의 차유리 역시 그렇다.

죽은 뒤에도 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이가 넘어지지는 않는지,
울지는 않을지, 곁에 붙어 늘 지켜본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향한다.
5년간 변함없이.
닿지 못하고,
그래서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도 없고,
아이가 듣도록 소리칠 수도 없지만,
늘 아이의 곁을 지키며 발을 동동대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채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차유리는 믿는다.
자신이 받은 49일의 기회는
지금껏 못한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라고.
딸을 안아주고, 딸과 대화하고, 딸을 지켜줄 수 있는 시간이라고.
기적의 시간, 기적의 끝
하지만 <하이바이, 마마!>는
그 믿음을 아주 조용하게 뒤집어 버린다.
차유리의 삶은
온통 딸 서우를 향해 있다.
죽는 순간에도, 죽은 다음에도
아이가 최우선이었다.
아이가 처음 걷는 모습도,
처음 말을 하는 순간도,
엄마 없이 자라는 시간도
곁에서 모두 지켜보았다.
살아 있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래서 차유리의 선택은 어렵다.
딸을 안고 싶다.
엄마라고 불리고 싶다.
다시 함께 살고 싶다.
그 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그 사랑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차유리가 돌아온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남편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흔들리고,
남편이 꾸린 새로운 가족은 불안해진다.
딸은 혼란스러워한다.
차유리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차유리가 사라져야만 평온해지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차유리는
점점 깨닫게 된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다른 기적, 또 하나의 엄마
이 작품에는
또 다른 엄마가 있다.
차유리의 엄마,
전은숙.
차유리는 평생
딸을 사랑하는 자신,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
사랑의 주체인 자신만을 인지해 왔다.
정작 자신이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은,
그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신과도 같은 또 다른 엄마가 있다는 것은,
너무 늦게 이해한다.
49일의 기적은
차유리의 것이 아니었다.
기적의 시간 동안
그 시간의 주인으로서 딸 서우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차유리는 몰랐을 것이다.
사실 그 시간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지 자신은
자신의 엄마, 은숙이 만들어준 기적 속에서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한 은숙의 묵묵한 기다림으로 서우와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임을.
내 딸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고.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다고.
죽은 딸을 향해
오랫동안 기도한 엄마의 바람이 만들어낸 49일의 기적.
이 사실이 잔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차유리가 딸 서우를 위해 완전한 소멸을 다짐하는 대신,
차유리의 엄마 은숙은, 또다시 딸을 빼앗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은숙이 불러낸 기적으로 유리는 서우와의 시간을 선물 받고,
그 선물 속에서 자신의 부재만이 서우의 앞날을 지킬 수 있음을 깨닫지만,
정작 그 기적을 불러낸 은숙은, 그 절망적인 기적 때문에
딸과의 두 번째 이별, 딸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선택은 차유리의 몫이고
그 선택을 감내하는 것은 은숙의 몫이다.
차유리는 엄마가 되어서도 깨닫지 못하던 엄마의 마음을
가장 아픈 순간에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서우를 걱정했던 것처럼
엄마도 자신을 걱정했을 거라는 것을.
자신이 서우를 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엄마도 자신을 보고 싶어 했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서우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처럼
엄마 역시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딸로 태어나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너무나 오래 걸렸다.
이별을 택하는 사랑, 사랑을 택하는 이별
차유리는 선택해야 한다.
살아남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차유리가 살아남으면
서우는 엄마를 얻는다.
하지만 동시에
평범한 삶을 잃게 된다.
귀신 보는 아이.
죽은 엄마가 돌아온 아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차유리는 누구보다 서우를 사랑한다.
그래서 곁에 있고 싶다.
하지만 누구보다 서우를 사랑하기 때문에
곁에 있을 수 없다.
<하이바이, 마마!>의 결말이 유독 아픈 이유는
차유리가 결국 사랑을 포기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사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고 싶은 마음보다,
자신이 함께 있고 싶은 마음보다,
아이의 평범한 내일을 먼저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남편에게도,
가족에게도,
또 한 번의 이별을 안겨준다.
한 번 죽음으로 헤어졌던 사람과의
진정한 이별.
어쩌면 첫 번째 이별보다
더 잔인한 이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이바이, 마마!>의 결말을 아쉬워한다.
기적은 곧 행복으로 귀결될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을 배신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대신 질문한다.
사랑은 정말 함께 있는 것만을 의미하느냐고.
곁에 남는 것이 사랑이라면,
떠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냐고.
차유리는 끝내 떠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한 순간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차유리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평생 자신의 전부라고 믿었던
딸을 향한 사랑보다도 더 크고 오래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만큼,
누군가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하이바이, 마마!>는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가 되어버린 딸이,
비로소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가장 슬픈 장면은
차유리가 떠나는 순간이 아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랑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 순간이다.
결국 가장 큰 사랑은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한 채
평생 받아온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