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바둑을 통한 ‘입실조과’의 미학

안녕하세요! 미뮤엔토 대학생 에디터 1기 허시원입니다.

여러분은 ‘입실조과(入室操戈)’라는 사자성어를 아시나요?

“남의 방에 들어가 그 방에 있던 무기를 빼앗아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한나라의 학자 하휴가 키운 제자 정현이, 스승의 학설을 바탕으로 오히려 스승을 능가해 버린 일화에서 유래한 말이죠.

이번에 소개해 드릴 영화는 바로 한국 바둑계의 거대한 입실조과를 다룬 작품, <승부>입니다.

바둑판 위 흑돌과 백돌이 만들어내는 심플한 미감 속에 감춰진, 피 터지는 경쟁을 밀도 있게 연출한 작품입니다.

 


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

당시 세계적인 바둑 대회를 휩쓸며 국민적 영웅이 된 조훈현은 한 바둑 행사에서 어린 이창호를 마주하게 됩니다.

바둑을 배운 지 고작 반년 만에 ‘신동’이라 불리는 아이의 실력이 궁금해진 조훈현은 직접 대국을 청하죠.

어린 이창호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챈 조훈현이었지만,

자신이 걸어온 승부사의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치열한지 알았기에

함부로 아이에게 헛된 기대를 심어줄 순 없었습니다.

조훈현은 어린 제자에게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기괴한 바둑 문제를 내주며

“이를 풀어내면 다시 바둑을 두자”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창호는 끈질기게 며칠 밤낮을 고민한 끝에 마침내 해답을 찾아냈고,

자신의 풀이를 우편으로 조훈현에게 보냅니다.

그 어린 눈빛에 담긴 당돌함과 비상함에 매료된 조훈현은

마침내 이창호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판이 바뀌다

화려하고 공격적인 방식을 자랑하는 조훈현의 바둑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창호와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조훈현은 제자가 자만하지 않도록 좀처럼 칭찬을 건네지 않았고,

은연중에 자신의 바둑 스타일만을 고집하곤 했습니다.

스승의 거대한 그늘 아래서 이창호는 깊은 회의감에 잠깁니다.

 

방황하던 이창호에게 바둑계 선배들은 묵직한 조언을 건넵니다.

“상대를 이기려고 할 때 바둑은 강해지고, 비로소 배워진다.”

“조훈현을 이길 생각으로 배워봐라.”

이 한마디는 이창호의 내면을 깨우는 자극제가 됩니다.

이창호는 스승을 ‘존경의 대상’에서 ‘이겨야 할 상대’로 바라보며

비로소 자신만의 바둑을 정립해 나갑니다.

화려한 공격성 대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계산을 통해 숨통을 조여오는 이창호만의 바둑이 탄생한 것이죠.

결국 스승과 제자가 정면으로 충돌한 최고의 대국.

이창호는 스승에게 배운 모든 실력을 총동원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머니다.

바둑판이 180도 뒤집히는 극적인 연출과 함께,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완벽한 입실조과의 순간이 됩니다.

 


스승 이창호와 제자 조훈현?

늘 정상의 자리에서 군림하던 조훈현은 생애 가장 충격적인 패배를 맛봅니다.

심지어 그 패배를 안겨준 이가 자신이 정성껏 길러낸 제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지독한 번아웃과 회의감을 안겨주죠.

 

날카롭던 그의 창은 무뎌졌고, 대국을 멀리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승리에 온전히 기뻐할 수도, 패배에 마냥 화를 낼 수도 없는 이 침묵은 사제지간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이 위태로운 상태를 깨뜨린 것은 과거 이창호에게 향했던, 바로 바둑계 지인들의 그 조언이었습니다.

“상대를 이기려고 할 때 바둑은 강해지고, 배워진다.”

조훈현은 어찌 보면 익숙해진 정점에서 떨어지는 경험을 통해

다시금 위로 오르려는 절박함, 의지가 불타오를 수 있게 됩니다.

즉, 스승이 제자를 통해 바둑을 다시 ‘배우는’ 거대한 승부의 순환이 시작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배움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다시 스승이 되는 바둑판 위의 세계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혹은 내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배울 점이 없다는 오만은 우리를 정체되게 만듭니다.

내가 가르친 제자에게 기꺼이 패배하고, 그 패배를 발판 삼아 다시 한번 바둑판 앞에 앉은 조훈현의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부사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통해 삶을 배우고 계시나요?

때로는 내 뒤를 따르는 이들의 걸음 속에서 새로운 내일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미뮤엔토 에디터 허시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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