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마음이 답답할 때 무작정 길을 걷는다. 저 앞을 보고 걷다 보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삶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걷는 순간만큼은 그 안일한 착각에 사로잡혀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잠시나마 맛보는 ‘해방’의 맛이다.
‘해방’을 가능케 하는 ‘추앙’
‘미정’은 회사 동호회로 ‘해방클럽’을 개설한다. 그녀는 자기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지도 않은 삶. 어디에 갇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갇혀있는 기분. 그들은 그 삶을 뚫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평소 ‘미정’을 괴롭게 했던 직장 상사는 그녀에게 해방클럽을 들먹이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미정’은 답한다. “지긋지긋한 인간들한테서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미정’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은 ‘구씨’이다. 그리고 ‘미정’은 그에게 사랑이 아닌 추앙을 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해 봤지만,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었던 미정은 무조건적인 애정과 지지를 퍼부어줄 내 편이 필요했다. 미움 없이, 판단 없이, 그저 받드는 것. 내 책임과 네 책임, 내 몫과 네 몫을 가리면서 살아가는 삶에서 이런 존재를 만난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앞서 ‘구씨’가 ‘미정’의 해방을 가능하게 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온전히 그로 인하여 해방을 이루게 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진정한 해방을 이루었다. 진정한 해방은 추앙받을 때가 아니라 추앙‘할 때’ 이뤄지기 때문이다. 추앙한다는 것은 온 마음으로 상대를 껴안는 것. 그리고 나를 껴안는 것. ‘미정’은 극중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내가 힘이 없는 거야. 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로 나를 세워놨으니까.” (15화 中)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나의 삶이 미워하는 그 누군가의 몰락을 위하여 쓰인다면, 내 삶이 너무 가엽지 않을까.
‘진짜 삶’이 놓인 곳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공간의 속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미정’과 가족들의 집이 있는 경기도 산포시(가상 도시)와 그들의 직장이 있는 서울. 이 두 공간은 단순히 집과 직장이라는 특성을 넘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도록 한다.
집이 있는 산포시에는 삶이 있다. 삶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밥을 해 먹고, 밭일을 하고, 가족들과 한집에서 부대끼는 일이다. ‘미정’, ‘창희’, ‘기정’ 세 남매에게 산포시에서의 삶은 끔찍하게 지긋지긋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이다.
반면 직장이 있는 서울은 온갖 욕망과 세속적인 것들이 들어찬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욕망을 가리고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창희’는 승진 경쟁 상대인 ‘정 선배’를 헐뜯지만 사실은 그녀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가득 차 있고, ‘기정’은 바람둥이로 소문난 직장동료를 욕하지만 실상은 왜 자기만 건너뛰냐며 역정을 낸다. ‘미정’ 역시 속으로는 사람을 물어뜯으면서 겉으로는 수더분한 척을 한다.
‘구씨’ 또한 마찬가지다. ‘구씨’의 선배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산포시에서 살고 있는 그를 찾아와 ‘쇼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정말 이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을까? 그의 진짜 삶이 놓인 곳은 서울일까 산포시일까. 그는 서울이 자기 자리라 여겨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삶을 살아본 자는 삶을 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서울로 올라간 ‘구씨’가 그토록 괴로웠던 이유다.
하지만 이들은 곧 서울에서도 진짜 삶을 살게 된다. 삶이 놓인 곳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있는 그곳이 우리의 ‘진짜 삶’이 놓인 곳 아닐까.
이들의 해방은 결국 미움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을까. 타인, 혹은 나를 미워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누군가에게 “내가 여기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다른 이의 존재를 껴안는 순간, 나의 해방은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