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성우의 학생 교육 영상을 보았다.
“외형은 음색이고, 내면은 말투야.”
단순히 화면 속 인물에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론이 아니라
진실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말처럼 들렸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말로 대화를 나누지만
생각하는 방식도,
그 생각을 말로 꺼내는 방식도,
말의 분위기까지도,
사람마다 각자의 고유함을 가지고 있다.
음색이 주는 말의 분위기는 사람을 조금 더 진중하게, 혹은 사랑스럽게 만들고
말투에 스며있는 올곧거나 여린 태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낸다.
말은 그런 것이다.
말은 같고, 우리는 다르다
숙명적으로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사람,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 선수,
기선겸.

뒤돌아보는 순간 패배가 확정되는 달리기의 세계를 사는 그는
말조차도 거침없다.
두 번, 세 번 곱씹어야 의미를 알 수 있는 말은
단 몇 초에 승패가 결정되는 기선겸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짧고,
빠르고,
직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뱉는다.
반면
관성적으로 뒤를 돌아봐야만 하는 사람,
외화 번역가 오미주는
같은 장면을 수없이 되감기 하는 번역의 세계에 선다.

있는 그대로만 옮기는 말은
그의 세계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조금 더 정확한 단어로,
조금 더 어울리는 상황으로,
그의 말은 단순한 문장을 넘어
맥락과 장면까지 함께 옮긴다.
두 사람의 “말”은
필연적으로 다르다.
말의 환경이 다르니 당연하다.
같은 언어로 대화하지만
두 사이에는 분명한 통역의 과정이 필요하다.
같지만 다른 서로의 언어는
서로에게 오해와 상처를 가져다준다.
뜻과는 다르게.
하지만 그 말들을
단지 오해만으로 남겨두고는 싶지 않기 때문에
뜻 모를 말들을 해석해 내려 애쓴다.
번역되지 않는 마음을 향해

오미주는 외화 번역을 업으로 삼으면서
기선겸의 통역 일까지 겸한다.
두 시간짜리 영화 속 대사를 옮기는 일보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던지는 기선겸의 한 마디가
오미주에게는 더 낯설고, 더 어렵다.
숨은 뜻을 짐작할 수도 없고,
해석할 여지도 없이 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말.
그 말을 어디까지 옮겨야 하는지, 선을 잡기조차 쉽지 않다.
통역가는 통역 대상자의 귀가 되고, 입이 되는 일이지만,
때로는 직접 말을 고르고, 다듬고, 방향을 바꿔 전달해야만 한다.
무례한 질문은 한 번 걸러내고,
날 선 말은 모서리를 조금 깎아 둥글게 건넨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통하지 않는 말 앞에서
오미주는 번역가로서의 방식이 기선겸에게는 유효하지 않음을 느낀다.
모르는 분야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픈 것이 사람 마음이라 그런가,
오미주는 점점 더 기선겸이 궁금해진다.
기선겸의 말과
그 말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기선겸이라는 사람까지도.
기선겸의 날 선 말끝에서
그가 가진 상처를 보았을 때,
오미주는 확신했다.
그의 말이 궁금하면서도,
그가 알려주는 말 속에는 슬픈 말이 없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쉽게 번역되지 않는 그의 마음에,
오미주는 두 걸음 더 다가서려 한다.
말보다 중요한 것
기선겸과 오미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사람은 각자의 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대한민국에는 5천만여 개의 말이 존재하고,
그 말들은 같은 언어를 통해 태어났음에도
타인에게 완벽히 해석되기 어렵다는 것.
전 세계를 통틀어 60억 개나 되는 서로 다른 말 사이를
헤엄치는 우리는
단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익숙한 언어의 사용 방식이 아니라
낯선 언어를, 새로운 말들을,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라는 것.
그 마음만 있다면
끝내 맞닿지 않을 것 같던 두 언어는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 속에 담긴 마음까지도,
비로소 서로에게 닿게 된다.
그냥 뻔한 사랑 얘기
<런온>에서 잠깐 스치듯 지나가 말,
“그냥 뻔한 사랑 얘기예요.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미친 여자일 수도 있고, 찌질이일 수도 있고, 싸이코패스일 수도 있고, 쓰레기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일 수도 있어요.”
결국 사랑은
하나의 방식으로, 하나의 모습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되며,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닿는다.
누구에게나 뻔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내가 찌질이가 될지, 첫사랑이 될지,
그것은
뻔한 사랑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가는
두 사람의 몫이다.
그 사랑을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려있다.
기선겸과 오미주처럼.
너무나도 다른 서로의 언어를 퍼즐처럼 맞춰나가는
두 사람의 사랑은
난제에서 이해로 변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