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세로 1미터 남짓한 나무 상자. 그 속에 한 남자가 갇혀 있다. 그는 범죄자도 아니며 노예도 아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세자이며, 그를 가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이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허구도 아니고 실제로 한국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슬픈 운명, 오늘은 뒤주에 갇힌 남자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2015년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는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었던 가족이야기인 ‘임오화변’을 영화로 담아냈다. 개봉당시 총 관객수 6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조선의 제 21대 국왕인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끈질기게 시달렸다. 영조는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인 세자가 자신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랬지만 점점 삐뚤어져 가는 그의 모습에 날이 갈수록 실망해간다. 사도세자가 처음부터 영조의 눈 밖에 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주위에서 많은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그 관심이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부담이었던 걸까. 점차 커가며 아버지와 다르게 학문보다는 예술과 무술에 뛰어난 기질을 가졌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서로의 갈등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간다.
유교사상과 왕관의 무게가 부숴버린 부성애
우선, 한국의 ‘유교적 가치’를 알아야 이 영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는 철저히 유교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유지되었다. 유교는 2,500년 전 공자가 체계화한 인본주의의 도덕 사상으로 ‘나를 닦아 남을 다스림’이라는 의미의 수기치인을 바탕으로 인과 예를 강조한다.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통해 가정과 국가의 조화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현대 시대까지 이르러 한국인들의 삶과 도리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이다. 구성원 간의 화합과 질서, 책임감을 강조하고 사회 질서와 전통적인 통치 이념을 유지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만약 한 개인의 존재가 이러한 사회 구조에 해가 된다면 어떨까. 영화에서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관계에서도 유교적 가치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왕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개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지만 영조의 눈에 사도세자는 유교를 저버리고 질서를 어지른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과 함께 종묘를 찾은 왕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여기 종묘에 올 때마다 조상들의 피 울음소리를 듣는다.” 아무리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라도 유교적 사상과 왕가의 법도 아래에서 철저히 희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새기며 아들에게 ‘왕실에서 태어난 순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닌 국가의 보존을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한다는 의미’를 전한 것이다. 그런 유교사상과 완벽한 왕의 핏줄을 이어야 한다는 무게가 부자관계를 결국 파멸로 이끌었다.

뒤주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자유로운 영혼
그렇다면 왜 뒤주였을까?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러서도 가로 세로 1미터, 다리를 쭉 뻗을 수도 없는 그 작은 뒤주에 자기 자식을 가둬 죽였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충격적이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이 작은 뒤주는 더욱 더 엽기적이고 기상천외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들을 뒤주에 넣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 내면에는 조선 왕실의 복잡한 법칙이 깔려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적의 가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에게 존재 자체가 역적이라는 폭언을 들은 세자는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아버지가 머무르고 있는 경희궁으로 칼을 들고 간 그 날 밤, 그 순간 세자는 역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시대에서는 세자가 공식적으로 사형을 당하거나 역적이라는 이름 하에 죽게 되면 그의 아들과 가족들까지 모두 역적의 무리로 역사에 남아 처형되어야만 했다. 영조는 아들을 죽이되 손자인 정조는 반드시 왕으로 세워야 했다. 하여 사약이라는 공식적인 사형을 내리지 않고, 뒤주에 가두는 ‘방치’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시간이 흘러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 22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뒤주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비극은 끝이 없었다. 홀로 서있는 사도세자의 모습은 참 애잔했다. 그 당시 나라의 잘못은 전부 세자의 잘못이었고 아버지의 폭언과 호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 누구도 그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뒤주에 갇힌 지 8일 째 되는 날, 아버지의 애정 어린 시선을 갈망하던 아들은 그렇게 차갑고 작은 뒤주 속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원래 이름은 ‘장조’였다. 그가 죽고 난 뒤, 생각할 사(思) . 슬퍼할 도(悼)의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도세자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영조의 뒤주는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수많은 형태의 뒤주가 존재한다. ‘완벽함’과 ‘성공’이라는 명목 아래, 여전히 자녀의 삶을 규정짓고 가둔다. 외국인들에게 <사도>를 추천하는 이유는 이 비극이 특정 시대의 역사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삶에도 진행되는 인간의 욕망과 통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날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뒤주 너머 상대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