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이정현)과 규정(이해영)은 공장에서 만나 부부가 된다. 두 사람의 꿈은 단 하나, 내 집 마련이다. 그러나 규정의 청력 손실로 인한 인공와우 수술이 모아둔 돈을 한순간에 날리고, 뒤이어 공장 사고로 규정은 두 손가락을 잃는다. 상실감에 무너진 남편 곁에서 수남은 신문 배달, 청소, 식당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대출까지 받아 끝내 집을 장만한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규정은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해 식물인간이 되고, 수남은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간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집이 재개발 우선 구역으로 선정되자, 수남은 보상금을 지키기 위해 찬성 서명을 받으러 다니다 끝내 살인까지 저지른다.

수남은 게으르지 않다. 아프지 않으면 일하고, 아파도 일한다. 우리 사회가 ‘성실하다’고 부르는 삶의 형태와 그의 삶은 완벽히 일치한다. 그런데 그 성실함이 도달한 곳은 살인이다. 영화는 이 귀결 앞에서 묻는다. 문제는 수남인가, 아니면 수남을 성실하게 만든 구조인가.
수남의 성실함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순수한 의지나 자기실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꿈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해 버틴다. 자기계발 담론이 말하는 성실함은 주체적 선택의 언어지만, 수남의 성실함은 선택이 박탈된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세계 안에서, 성실함은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최저 조건이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구조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집을 사지 못하는 것은 집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충분히 벌지 못해서가 되고, 남편이 다치는 것은 노동 환경이 불안전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가 된다. 성실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역량 문제로 환원하고, 결과적으로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수남에게 연대의 언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목표를 향한 단독 행진만을 가르친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이웃들은 과거엔 같은 처지였던 사람들이지만, 수남의 세계 안에서 그들은 동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된다. 살인은 수남의 일탈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삭제될 때 도달하는 논리적 극단이다. 수남은 괴물이 아니다. 그는 이 사회가 만들어낸 최적화된 성실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최적화의 끝이 살인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최적화하고 있었던 것인가.
수남과 대비되는 존재가 규정이다. 손가락을 잃은 규정은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다. 성실함의 언어는 노력과 생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언어 속에 규정의 자리는 없다. 규정의 자살 시도는 단순한 개인적 절망이 아니다. 더 이상 성실할 수 없게 된 몸이, 성실함을 요구하는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제거하려는 시도다. 수남이 성실함을 내면화해 살아남은 인물이라면, 규정은 그 이데올로기가 끝내 수용하지 못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같은 세계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서진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성실함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실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고. 당신을 성실하게 만드는 구조가 문제라고. 영화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질문을 남긴다. 앨리스가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거울 나라처럼,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성실히 달리고 있는가. 수남의 이야기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 우리와 무관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