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풍자 영화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리뷰
안국진 감독 / 이정현 주연
줄거리
정수남(이정현)은 이름 그대로 ‘성실한’ 사람이다.
중학교 졸업 무렵 공장 취직과 진학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다.
여상에서 고2 때 자격증을 13개 딸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그 모든 손재주는 시대에 밀려났고 컴퓨터를 들이지 못한 작은 공장의 회계원으로 겨우 자리를 잡는다.
그곳에서 청각장애가 있는 남자 규정(이해영)을 만나 결혼한다. 수남은 규정의 보청기 수술비 2천만 원을 마련하며 둘의 삶이 나아지길 바랐지만, 규정은 이후 근무 중 사고로 한 손을 잃는다.
생산직 노동자에게 한 손의 부재는 생계의 붕괴다. 수남은 여러 개의 일을 동시에 하며 오직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 하나로 버텼고, 결국 집을 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극도의 무기력에 빠진 규정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다 식물인간이 된다.
수남에게 남은 것은 집 한 채와 깨어날 기미 없는 남편, 그리고 쌓여가는 병원비였다.
그런데 세상이 성실한 사람에게 상을 내린 걸까? 수남이 살던 동네의 재개발 소식이 들려온다.
수남은 그 기회를 반드시 붙잡기로 결심하고, 영화는 이때부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평범한 사회극처럼 보이던 이야기는 점점 블랙코미디와 고어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간다.
Key Point
제목이 이 영화의 전부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다.
토끼굴 너머의 세계는 말이 안 되고, 불합리하고, 기괴하다.
수남의 세계는 다르다. 이상한 게 아니라 성실한 나라다. 규칙대로 하고, 열심히 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고 믿는 나라.
그런데 성실하게 사는 수남이 감당해야 할 짐들은 점점 늘어간다.
이 역설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건 당연하다.
성실한 나라에서 성실한 사람이 파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수남은 사람을 죽인다. 그것도 여러 명.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수남을 막연한 악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수남은 여전히 자기만 잘하면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살았다고 믿으며, 그 믿음 안에서 행동한다.
살인조차도 그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이것이 블랙 코미디로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무서운 지점이다. 수남의 광기에 공감 가능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Warning Point
내용 전개가 지나치게 엉뚱하고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수남의 행동이 점점 비약적으로 확장되는 후반부에서 개연성의 균열을 느끼는 관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과장은 사실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풍자의 도구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한 톤 높여 그릴 때, 비로소 현실의 어떤 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건 영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 영화는 웃기고 무섭고 슬프다. 그것이 동시에 온다.
블랙 코미디 특유의 정서적 혼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모르는 그 상태— 에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쉬운 영화가 아닐 수 있다.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포스터 속 문구다. 수남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욕망이 아니다.
문제는 정당하게 살아서는 정당한 욕망을 이룰 수 없도록 설계된 세상이다.
201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2026년에도 전혀 낡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비극이자 가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