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무용한 것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을 이유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더는 무용하지 않다.
총칼로 세상을 바꾸기보다,
글로, 사진으로, 알리고 기록하며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고자 한다.
그런 김희성이기에,
조선 사람 착취하여 권세를 이룬 양반집의 3대 독자 도련님이기에,
천하가 뒤집혀도 제 살길 찾아 제국주의 바짓가랑이나 붙잡는 집안의 아들이기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종이에 눌러쓰고
살아남은 자의 살아남은 죄책감을 되새기며
변화하는 대한과 끝내 발 맞추어 나아갈 줄 알았다.
그것이
조선 사람에 빚진 게 많은 김희성이
조선을 사랑한 고애신의 곁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인 동시에
고애신이 사랑한 조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꽃 타령하는 팔자 좋은 도련님의 양복 깃 안에
사무치는 죄책감을 품고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것이
김희성이라고 생각했다.
펜을 들고 죽는 자
기록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있어야만 한다.
격변하는 조선을 글로, 사진으로 담아
바깥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기록하는 자만큼은
몰아치는 조선의 한가운데, 태풍의 눈에 위치해야만 한다.
총탄이 스치는 시대의 중심에 선 자가 바로
김희성이다.
부모를 잘 만난 것인지, 잘못 만난 것인지,
근처까지 날아든 총탄이 절대로 몸에는 닿지 않는 사람.
허허실실 웃는 얼굴에
칼 든 이도 차마 휘두르지는 못하게 만드는 사람.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세상에
제 목숨 하나만큼은 끈질기게 붙들려 있는 사람.
그러니, 중심에 서서 기록하는 일을 의무로 받들 수 있는 사람.
죽지 않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
김희성은 그런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제가 죽을 순간을 직접 정해야 하는 존재다.
자신을 피해 가기만 하는 총칼 앞에
저도 모르게 죽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저 곁에서 죽어가는 조선을 눈에, 글에, 담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으려거든 제 발로 직접 죽음에 걸어 들어가야만 한다.
안 들키고 숨어있다가, 꼭 발견되어야 할 것들
김희성은 자신이 모으고 기록해 온 순간들을
땅에 묻는다.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살생부가 되지만
자신의 품에 있으면 기록이 될 수많은 영웅의 이름과 얼굴을.
더는 자신이 끝까지 품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오래 살아남았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발견되기를 바라며
조용히 땅속에 묻어둔다.
그리고, 일본이 들이닥칠 자신의 이름 없는 신문사에
꼿꼿이 명패를 세운다.

편집장, 김희성.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땅속에 파묻고,
비로소 김희성이 죽음으로 향하는 준비를 끝마쳤다.
조선인, 미국인인 조선인, 일본인인 조선인, 그리고 조선
살아남은 것은 조선, 하나뿐이다.
조선에 버림받는 미국인과
스스로 조선을 버린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에 빚을 진 조선인은
조선 그 자체를 사랑한 고애신을 지키기 위해,
고애신이 사랑한 조선을 위해,
조선에서 눈을 감았다.
기록하는 자로 끝까지 살아남기를 택할 것 같던 이 역시도
격변하는 조선의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살리기 위해,
기록보다 앞서, 기록되어 마땅한 이들을 지키기를 택했다.
일평생 유약한 도련님으로,
여유롭고, 능글맞게 살아온 김희성의
더 이상 목숨을 빚지지 않겠다는 결심.
그리고 자신의 목숨으로 지켜낸 대한의 미래.
그가 자신의 삶을 걸고 증명한
무용하고 아름답지만,
결코 무용하지 않은 것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