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 이름 없는 비극에 대하여

이름을 짓는 행위는 곧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행위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역사에 남을 사건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처음에는 폭동이나 사태라 불렸던 5.18은 비로소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난동이나 폭력 사건이라고 불렸던 4.19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반면 제주 4.3 사건은 여전히 ‘사건’이라는 명칭으로만 불리고 있다. 오랫동안 언급이 금지되었을 뿐더러, 학계의 시각과 평가가 아직 명확한 방향으로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 등을 만든 정지영 감독은 이 점에 착안한 것인지 제주 4.3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던 한 여성이 잃어버린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난 4월 15일 개봉한 염혜란 배우 주역의 <내 이름은>이라는 작품이다.


실화가 지닌 힘을 빌리고, 이자를 붙여 갚는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는 의외로 많지 않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포함하더라도 손에 꼽을 정도다. 아무래도 제주 4.3 사건의 인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탓일까. 작년 개봉한 <한산>도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개봉한 작품이 <내 이름은>이다.

작품을 감상하기 이전에는 주인공인 ‘최정순’ 역의 염혜란이 단독 주연으로 극을 이끌고 나가는 줄 알았지만, 막상 보고 나니 주인공의 아들인 ‘이영옥’ 역의 신우빈도 못지않게 비중이 컸다. 역사적 비극이 부모에서 자식 세대로 이어지고 이어지며 기억에 남는다는 구조는 익숙하지만 충분히 좋았고, 추가로 이름에 숨겨진 약간의 반전 요소는 꽤 인상적이기도 했다.

특히 ‘정순’이 춤추는 장면은 미장센이면 미장센, 음악이면 음악 모두 훌륭했는데, 이 씬을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수미상관 구조로 사용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평할 만하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상당히 뛰어났다. 사실 배우들의 연기가 심각히 못 봐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편인데, 신우빈 배우가 극중에서 연기하는 ‘이영옥’이라는 캐릭터는 18세 남자 고등학생의 이미지를 너무나도 잘 구현해 기억에 남았다. 학교에 있을 때 드러나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미묘한 긴장감, 가족과 있을 때면 뭔가 숨기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는 모습이 무척 현실적이었다.

주인공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회상 장면은 극의 템포를 크게 늦추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삽입된다. ‘그래서 대체 이 내용이 주인공의 이름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냐’는 의문도 극이 진행되는 내내 증폭되고, 마지막에 가서 해소되는 식으로 엔딩을 맺는다. 이러한 요소들이 합해져 결과적으로 <내 이름은>은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감동적인 자극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창작물은 결코 현실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말도 있듯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에는 본질적인 힘이 있다.

이런 역사적 비극을 담은 작품들은 대중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비로소 역사를 인지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에 의의가 있다. 최근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으로 계유정난과 세조, 한명회, 그리고 단종과 관련된 정보가 SNS와 방송 등지에서 범람하는 것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실화가 지닌 힘을 빌렸으니 대중들에게 전파해 인지도를 높이는 식으로 이자를 붙여 갚는 셈이다. 물론 빌린 것을 망가뜨리는 행위, 즉 실화를 훼손하거나 모욕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테지만 말이다.


디테일의 부족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이름은>은 제주 4.3사건이라는 실화를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다만 영화 전체에 있어서 아쉬운 점은 확실히 존재한다.

먼저 시대극으로서의 면모가 그렇다. 극은 2026년 중년이 된 ‘정순’의 아들 ‘연옥’과 그 친구들을 보여주며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8년 전인 1998년으로 돌아가고 이후 ‘정순’이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회상 장면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벌어졌던 1948년까지 돌아간다. 시간적 배경이 1948년일 때는 그래도 사람들의 차림새나 무대에서 그 시절의 느낌이 물씬 나지만, 1998년일 때는 그렇지 않다. 어떤 요소는 시대 반영이 잘 되어 있는데 어떤 요소는 지나치게 현대적이라 맞물리지 않고 이질감이 느껴진다. 영옥의 ‘요즘 것 같은’ 헤어스타일이나 김경태의 어머니가 입은 정장, 혹은 댄스 수업을 듣는 여성들의 옷차림이 그렇다.

공간적 배경이 제주도인 까닭에 극중 내내 사용되는 사투리도 조금 아리송한 지점들이 존재했다. 해당 지역 주민이 아닌 이상 제주도 사투리가 다소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인식일 것이다. 하지만 <내 이름은>은 따로 자막을 달아서 해석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대사를 듣던 중 놓치는 지점들이 분명 군데군데 존재하게 된다. 감독이 이를 우려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몇몇 장면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사투리를 강하게 쓰지 않다. 문제는 이건 또 이거대로 어색하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막 전학 온 아이를 보고 놀라거나, 조금 전까지 사투리로 말하거나 하던 캐릭터가 갑자기 서울말을 구사하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 놓쳐버린 주제들

흔히 발생하는 문제지만, <내 이름은>도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 실패한 양상이 보인다. 이는 주인공 ‘정순’보다 되려 그녀의 아들인 ‘영옥’ 쪽에서 엿보이는 경향이다.

조정환, 김경태 등의 등장인물을 위시로 이영옥 쪽에서는 학교폭력과 청소년 비행이라는 주제가 다뤄졌다. 소위 말해 몇몇 ‘일진’이 반의 권력을 지니고 학생들끼리 싸움을 붙이거나 술담배를 하고, 반장을 맡게 된 영옥이 거기 말려드는 식이다. 심지어 반의 계급 맨 위에 위치하고 있는 서울에서 온 전학생, ‘김경태’의 어머니가 ‘영옥’의 어머니, 즉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정순’의 주치의이기도 하다.

이는 캐릭터들이 점차 엮이며 어떠한 서사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정작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정순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영옥을 괴롭힌 경태의 모친이 자기 주치의라는 걸 알지 못하고, 이 요소는 작중에서 어떤 식으로도 활용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해석해 볼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전혀 쓰이지 않은 설정이기에 결국 억측일 뿐이다.

그뿐 아니라 경태는 영옥과 영옥의 절친 ‘민수’를 떼어놓으려고 열심히 이간질하는데, 딱히 그 동기도 알 수 없다. 아마 민수가 아니꼽게 보여서 부린 단순한 심술로 보인다. 결국 경태와 정환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민수와 영옥이 함께 싸우고, 그렇게 벌어진 패싸움 뒤에 처벌 받는 건 민수뿐이다. 주원인인 경태는 부모 뒤에 숨어 빠져나가고 앞잡이 노릇한 정환만 크게 다친 것을 보아 제주 4.3 사건의 메타포로 활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대로 어떤 후일담도 없이 28년 후로 넘어가 이때의 일에 대해 어떤 정보도 전해주지 않는 건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다. 마치 급하게 완결이 나 어떤 서사도 마무리되지 못한 작품을 보는 것만 같다.

물론 주인공 ‘정순’과 제주 4.3사건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메인 서사는 훌륭하게 마무리됐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가져간 ‘영옥’의 서브 서사가 허술하게 마무리된 점은 비판할 만하다. 차라리 영옥의 비중을 줄여 러닝타임을 줄이거나 아예 늘려서 깔끔하게 엔딩을 냈다면 어땠을까.


<내 이름은>은 작품의 본질인 제주 4.3사건과 이름의 상실이라는 주제에 충실했으나, 여러 요소를 추가로 덧대다 보니 최종적으로는 전체적인 완성도가 어중간해진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비극을 조명한다는 의의를 지닌 작품이다. 그날의 제주가 78년의 시린 겨울을 지나 겨우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관객들이 한 번쯤 선택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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