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팝, 빌리(Billlie)의 ‘ZAP’과 ‘WORK’ 리뷰

 

미스터리의 다락방을 부수고 나온 K-POP의 독보적 스토리텔러

빌리(Billlie)는 언제나 뻔한 서사를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행보를 보여준 영리한 스토리텔러다. 데뷔 때부터 이들이 일관되게 펼쳐온 세계관 중심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흥미롭고 기묘한 괴담이 하나 전해진다. 바로 ‘여름이 끝나는 11번째 날에 종이 11번 울리면, 사랑이 없는 존재가 나타나 마을 사람을 데려간다’는 서늘한 이야기다. 실제로 보랏빛 비가 내리던 그날 ‘빌리 러브(Billlie Love)’라는 한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이 평화롭던 세계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빌리는 그동안 정교하게 짜인 트랙리스트와 감각적인 뮤직비디오, 미스터리한 오브제들을 통해 이 수수께끼 같은 실종 사건을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추적해 왔다.

하지만 빌리가 이 거대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른 K-POP 아이돌 그룹들과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이 서사는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보랏빛 비를 맞았던 인물들이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두려움에 거짓말을, 누군가는 침묵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이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본인의 기억이 진짜 진실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사실이다. 즉, 사건 그 자체의 유무보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개인의 인식 자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진짜 균열이었던 셈이다.

생각해 보면 ‘Billlie’라는 팀 이름 속에는 데뷔 때부터 이미 모든 해답이 숨어 있었다. 분열과 둘을 뜻하는 ‘Bi’를 조심스럽게 지워내면, 왜곡된 기억과 환상을 상징하는 ‘Lie(거짓말)’와 숫자 ’11’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이들은 오랜 시간 그 거짓말이 단단하게 만든 틀 안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기억을 바꾸고, 감정을 지우고, 진실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무언가를 계속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 비밀의 무게 때문에 세계가 깨졌다고 믿었지만, 알고 보니 균열은 꿈과 상징, 그리고 왜곡된 기억 사이에서 처음부터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 멀어지게 느껴졌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내 안에 있는 답을 굳이 바깥의 다락방 너머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규 1집 [the collective soul and unconscious: chapter two]는 이 긴 방황과 비밀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본격적인 막을 올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빌리 러브는 사라진 적이 없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스스로 받아들이기 너무나 두려워 외면하고 잊어버리려 했던 ‘나 자신의 숨겨진 조각이자 이면’이었다. 무언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게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바뀐 것뿐이고, 외부의 누군가에게 빼앗긴 게 아니라 내 영혼이 스스로 잊어버리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 영리한 반전은 빌리의 서사가 단순한 판타지 수사극이 아닌, 인간의 심층 심리를 다룬 거대한 내면의 성장담임을 보여준다.

이제 빌리는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가”라는 외적인 행방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대신 “왜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믿었는가?”라며 날카로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이 질문의 끝에서 마주하는 건 자극적이고 극적인 반전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온몸을 전율케 하는 자각이다. 모든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무심히 지나쳐온 수많은 평범한 순간들 속에 이미 나 자신으로 숨 쉬고 있었다. 결국 빌리의 세계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오롯이 인식해가는 아름다운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외면하고 싶었던 내 안의 어두운 조각들, 인정하기 두려웠던 모순적인 이면들, 오랫동안 지우고 살았던 아픈 기억들까지 모두 모여 비로소 진짜 ‘빌리 러브’가 완성된다고 대중 앞에 솔직하게 고백한다. 비밀이 거짓말처럼 걷히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내 모습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 멀리 외부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언제나 바로 여기 다정하게 서 있었던 존재로서 말이다

이 거대한 각성의 서사를 음악적으로 증명하듯, 이번 정규 1집은 대중음악의 전형적인 공식들을 과감하게 탈피한다. 다양한 마이너 장르들을 해체하고 결합한 파격적인 사운드 프로덕션을 통해, 내면의 파편들이 부딪치고 하나로 뭉치는 운동 과정을 청각적으로 근사하게 구현해 냈다. 특히 더블 타이틀로 내세운 ‘ZAP’과 ‘WORK’는 빌리가 음악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넓고 깊은 스펙트럼이자, 자아의 균열을 기분 좋게 깨부수는 상징적인 마스터피스 트랙들이다.

(TITLE)  ‘ZAP’

타이틀곡 ‘ZAP’은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끝없이 쏟아지는 가십과 타인의 시선을 단숨에 지워버리는(ZAP) 순간을 그렸다. 세련되면서도 거친 레이브 사운드가 돋보이는 곡이다. 세계관과 연결해서 들으면 그 몰입감이 배가되는데, SNS 속 누군가의 완벽한 일상과 내 초라한 과거가 대비될 때 밀려오는 피로감을 과감히 차단하는 느낌을 준다. “만약 이걸 전부 지울 수 있다면?”이라는 발돌림과 동시에 번쩍이는 충격처럼 곡의 진짜 매력이 폭발한다. 대중적인 이지리스닝 트랙들과 달리, 귀가 뻥 뚫리는 하이퍼팝과 거친 베이스 리듬을 과감하게 섞어 신선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첫 문을 여는 거친 베이스 사운드는 날것 그대로의 매력을 가득 품고 있다. 요즘 흔히 들리는 팝 음악들이 귀에 편안한 소리만 골라 담는다면, ‘ZAP’은 귀를 아슬아슬하게 자극하는 날카로운 신스 사운드와 묵직한 베이스를 거침없이 교차시킨다. 소리들이 멀리서 들리는 게 아니라 바로 귓가 옆에서 꽂히도록 입체적으로 디자인되어 있어서, 듣는 내내 주인공이 느끼는 복잡한 심리적 압박과 해방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심장을 쿵쿵 울리는 드럼의 묵직한 타격감 덕분에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게 만든다.

이 곡의 가장 짜릿한 하이라이트는 혼란스러운 사운드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빌리의 목소리 운용이다. 세상의 시선과 소음을 비웃는 듯, 후렴구 전까지는 감정을 쫙 뺀 채 차갑고 건조하게 노래를 이어간다. 이 낯선 목소리는 마치 세상과 나를 잠시 단절시키는 듯한 묘한 긴장감을 준다. 그러다 후렴과 후반부로 진입하는 순간, 온갖 디지털 효과음과 함께 멤버들의 보컬이 참았던 에너지를 터뜨린다. 마치 웹툰의 결정적인 한 장면처럼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브릿지 구간은, 듣는 이의 카타르시스를 아주 영리하게 끌어올린다.

여기에 멤버들의 시원한 샤우팅과 감각적으로 쪼개진 보컬 소스들이 화려한 랩 라인과 맞물리며 단단한 자아를 완성해 낸다. 날카롭게 꽂히는 라임 위로 “어제는 빼, 오늘로 back”이라고 외치는 노랫말은 단순한 가사를 넘어 쾌감을 준다. 과거의 미련이나 억압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의 나’를 선택하겠다는 당찬 선언을 매력적인 음악적 재미로 훌륭하게 증명해 낸 트랙이다.

(SUB-TITLE) ‘WORK’

서브 타이틀곡이자 이번 더블 타이틀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는 ‘WORK’는 참 매력적인 곡이다. 앞서 ‘ZAP’이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자각의 순간이었다면, ‘WORK’는 마주한 내면의 상처와 결함을 나만의 독창적인 무기이자 색깔로 인정하는 단단한 마음을 소리로 표현해 냈다. “오랜 상처도 대놓고 twist, 깨지고 다칠수록 단단해져 like a jewel”이라는 가사처럼, 완벽하지 않은 자아의 조각들이 부딪치고 깨지면서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baby 이마저도 나인 걸 SEE’라는 외침처럼, 못난 부분까지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단단한 자아 인식이 이 곡의 핵심이다. 음악적으로는 묵직하고 리드미컬한 베이스 하우스 구조 위에, 거칠고 차가운 힙합의 텍스처를 덧입혀 무척 독창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귀를 사로잡는 건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하고 육중한 베이스 리프다. 이 곡은 깊은 울림을 주는 아주 낮은 저음역대를 과감하게 강조하는 선택을 했다. 단순히 소리를 키운 게 아니라, 드럼 비트와 베이스 소리가 서로 밀고 당기며 숨을 쉬듯 역동적으로 밀려오도록 설계했다. 덕분에 음악이 흐르는 공간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입체감이 느껴진다. 트랙 전반에 은은하게 깔린 차가운 금속성 소리들과 미니멀하게 반복되는 신스 사운드는, 곡이 끝날 때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듣는 재미를 더한다.

‘WORK’의 구조적인 미학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방식에 있다.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구성 안에서도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둔탁하면서도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808 베이스가 튀어나와 곡의 다이내믹을 극대화한다. 후반부 직전까지 멜로디의 층위가 계속해서 변화하며 새로운 느낌을 들이미는 독특한 전개는, 깊은 내면 속을 헤매며 방황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단단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를 담은 트랙에 멤버 문수아가 직접 작사로 참여해 본인의 경험을 녹여냈다고 하니, 곡이 가진 진정성이 한층 더 선명하게 와닿는다.

특히 이 차갑고 기계적인 사운드 위에서 빌리 멤버들의 목소리는 트랙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저음의 목소리를 겹겹이 두텁게 쌓아 올려 만든 보컬의 벽은, 거친 기계음의 압도적인 무게감에 밀리지 않는 단단함을 보여준다. 랩 파트에서는 글자를 칼로 자르듯 명료하고 날카롭게 뱉어내며 마치 하나의 타악기처럼 기능하다가도, 보컬 파트에 진입하면 베이스의 일렁이는 흐름을 타듯 부드럽고 유연하게 이어지는 완급 조절이 일품이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뻔한 아이돌 팝의 틀을 깨부수고, 날것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살려낸 보컬 운용은 빌리라는 팀이 도달한 세련된 하드코어함의 정점을 보여준다.

 

 

비밀이 끝난 곳에서 시작되는 진짜 Billlie의 신세계

‘WORK’가 들려주는 압도적인 사운드는 사실 참여한 제작진의 면면만 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두 차례나 거머쥔 화지(Hwaji)의 날카롭고 시적인 노랫말이 곡의 뼈대를 이루고, 레드벨벳의 ‘빨간 맛’을 비롯해 세련된 K-POP의 대표작들을 만들어온 스웨덴 프로듀서 루드윅 린델(Ludwig Lindell)이 감각적인 멜로디를 설계했다. 여기에 빅토리아 모네의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세계적인 엔지니어 파트리시오 피글리아포코(Patrizio ‘Teezio’ Pigliapoco)의 믹싱 가공이 더해지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크리스 브라운의 전담 엔지니어로도 잘 알려진 그의 손을 거치면서, ‘WORK’는 기존 K-POP의 전형적인 사운드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압도적인 공간감과 단단한 음압을 완성해 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정규 1집은 빌리라는 팀이 단순히 주어진 독특한 콘셉트를 소화하는 수행자를 넘어, 자신들만의 정교한 대중음악의 한 장을 새로 쓰기 시작했음을 증명한다. 익숙한 클래식 샘플링부터 하이엔드 테크 하우스, 현대적인 필리 소울, 그리고 누 재즈나 드럼앤베이스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리믹스까지, 총 12곡의 트랙이 유기적이고 촘촘한 설계 아래 짜임새 있게 담겨 있다.

“우리는 무엇도 잃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을 뿐.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깨닫는다. 이제 더 이상 간직할 비밀이란 없다는 것을.”

앨범의 마침표를 찍는 이 강렬한 문장처럼, 빌리는 이제 신비로운 미스터리 뒤로 숨거나 스스로를 분열시키지 않는다. 타이틀곡 ‘ZAP’이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며 마침내 자아를 인식해 내는 첫 자각의 문장이었다면, 서브 타이틀곡 ‘WORK’는 그렇게 마주한 내면의 부서진 상처들을 당당하게 조립하고 다듬어 나가는 거칠고 주체적인 ‘과정’인 셈이다. 다소 낯설고 실험적인 장르들을 K-POP의 중심부로 대담하게 끌고 들어와, 이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팀의 코어 서사와 유기적으로 엮어낸 빌리. 이들이 완성해 낸 이번 앨범은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비밀의 다락방 문을 스스로 부수고 나와, 가장 주체적이고 세련된 하드코어 팝의 신세계를 보여주는 영리하고 묵직한 마스터피스다. 더 이상 숨길 비밀이 없는 곳에서, 이들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 이미지 출처: MYSTIC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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