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신(神)의 볕 아래 놓인 인간의 그림자

영화 <밀양>은 보이지 않는 신의 ‘볕’과 그 아래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그림자’를 집요하게 비춥니다.

 

우리는 흔히 완벽한 도덕적 진리나 사후의 구원 같은 이상향만을 ‘선(善)’으로 상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결백한 이상향에만 매몰될 때,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재’는 부정당하며 예상치 못한 폭력이 발생하곤 하죠.


‘정(情)’이라는 로컬리즘과 ‘무례함’ 사이에서

밀양으로 이사해 피아노 학원을 차린 신애에게 카센터 사장 종찬은 위조한 대회수상을 벽에 걸어놓습니다.

물론 이 장면은 허락을 받지 않은 종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외에 신애에게 내밀어지는 밀양 사람들의 손길은 처음 이사온 그날 신애에게는 부담이었지만,

밀양에 적응하면서 그녀는 그들의 행동들을 무례함에서 정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카센터 사장 종찬이 내미는 투박한 친절은 한국적 로컬리즘의 전형인 ‘정’을 대변합니다.

누군가에게 이 정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지만, 개인의 경계를 중시하는 이에게는 불쑥 선을 넘는 ‘무례함’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립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로컬리즘이 극단화되면 공동체 내부의 비도덕적인 행위조차 ‘우리끼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폐쇄성을 띠게 됩니다.

반면, 개인주의가 극단에 치달아 타인의 배려를 모두 무례로 치부한다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온기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공동체의 유대와 개인의 자율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 어느 한쪽만을 정당함으로 상정하지 않는 태도가 소통의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시선이 가두는 이분법

약사 부부는 남편을 잃은 신애를 향해 ‘불쌍한 사람’이라는 단어로 위로아닌 위로를 해주는 장면이 있는데요.

불쌍한 우리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기독교적 신앙심으로 회복시켜주려는 의도가 담겨있긴 합니다.

그러나 왜 신애는 이 부분에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요?

약사 부부가 신애를 향해 건네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기독교적 자비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위험한 선민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바 있죠.

이는 단순히 종교적 부정이 아니라, 진리와 허위를 엄격히 나누어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에 대한 경종입니다.

미래의 형이상학적인 이상향만을 ‘선’으로 여기고,

고통받는 현재를 그저 ‘부족하고 결핍된 것’으로 취급하는 이분법은 우리를 끝없는 고통 속에 가둡니다.

신애를 ‘불쌍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녀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신앙을 통해 채워야 할 ‘빈 그릇’으로만 전락하게 됩니다.

현재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못하고 이상향의 도구로 삼는 시선, 그것이 바로 신애를 짓누른 보이지 않는 폭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 믿음의 위험성과 ‘흐르는 진리’의 이해

신애는 아들을 잃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가 매달린 것은 신과의 인격적 만남이라기보다, 고통을 잊게 해줄 ‘절대적 정답’으로서의 맹목적 믿음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신애는 ‘원수도 사랑하라. 용서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가지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범인과 마주한 신애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는데요.

범인 또한 감옥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신애에게 말하게 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는데요.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하며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안정을 찾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 변화를 거부합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의 한 장면을 ‘캡처’해서 그 사진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믿으며 우상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권위자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쌓아 올린 믿음이 과연 ‘진짜 진리’일까요?

교리를 유동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고정된 텍스트로만 받아들일 때,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께 먼저 용서받았다’는 범인의 셀프 용서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자신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행해지는 맹목적인 신앙 생활은, 결국 예상치 못한 삶의 변수 앞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무기가 됩니다.

진리는 고정된 사진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의 현재와 함께 호흡하며 변화해야 하는 것임을, 영화는 신애의 절규를 통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 <밀양>은 보이지 않는 먼 곳의 구원을 좇느라 지금 내 곁의 온기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맹목적인 정답 아래 나 자신의 진심을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봅니다.

완벽한 볕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를 비추는 이 보잘것없는 햇살 한 조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그것이 신애가 그토록 갈구했던 진정한 구원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에디터 허시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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