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 정의의 보상, 무말랭이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으로 2000년대 IMF 이후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로손 편의점이나 복도식 아파트 등 지금에서 보면 추억처럼 느껴지는 요소들을 영화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품들은 단순한 시대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전반에는 IMF 이후 한국 사회에 퍼진 불안과 혼란이 짙게 깔려 있다.

 

줄거리

영화는 주인공 고윤주(이성재)가 강아지를 죽이며 아파트 내 강아지 실종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박현남(배두나)이 강아지 실종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교수를 준비하던 윤주는 개의 짖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개를 납치해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첫 번째 개인 시츄를 납치해 살해하려 하나 끝내 포기하고 지하실에 가둬둔다.

그러나 변경비(변희봉 역)는 지하실에서 시츄를 발견해 잡아먹는다.

이후 윤주는 짖음의 원인이 시츄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진짜 원인인 치와와를 납치해 옥상에서 떨어뜨린다.

이때 치와와의 시체 역시 변경비가 먹어 처리한다.

윤주의 아내가 푸들을 데려오나 윤주는 산책 도중 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개는 노숙자 최씨가 잡아먹기 위해 납치한 것이었으며 현남과 함께 이를 구출한다.

이후 윤주는 술김에 현남에게 자신이 범인임을 고백하지만, 현남이 이를 눈치챘는지는 끝내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메인 서사는 제목 그대로 “개”와 얽혀 있다.

개는 하나의 표상으로 작동한다.

윤주는 대학 교수 임용을 준비 중이나 뇌물을 줄 돈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는 인물이다.

현남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행정업무를 처리하지만, 나쁜 사람을 잡아 TV에 나오고 싶다는 꿈을 가진 인물이다.

때문에 업무 중 자리를 이탈하는 일도 잦다.

직장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려는 인물과, 직장도 팽개치며 정의를 이루려는 인물이 힘을 합쳐 개를 구하는 것 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윤주의 관점에서 개는 양심을 의미한다.

뇌물을 통해 교수직을 얻는 것에 대한 양심 말이다.

양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첫 번째 시도인 시츄는 차마 져버리지 못한 양심의 모습이다.

윤주는 끝내 시츄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인 치와와는 결국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이게 된다.

양심을 져버린 것이다.

특히 치와와가 윤주의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해석과 더욱 맞닿아 있다.

스트레스를 비인간적인, 양심을 져버린 태도로 해결하기 때문.

마지막 푸들의 경우 양심 회복의 마지막 기회이다.

아내가 선물한 마지막 양심, 그러나 이미 양심을 버린 윤주에게 푸들은 너무나 쉽게 사라져버린다.

되찾는 과정 역시 그가 아닌 현남 덕에 이루어진다.

영화 마지막 교수가 된 윤주의 무기력한 모습과 연결 지으면, 이는 결국 양심을 포기한 이의 말로처럼 보인다.

 

특히 세번째 개 실종사건은 의미가 남다르다.

윤주는 영화 내내 주체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교수직을 위한 뇌물 자금은 아내의 퇴직금이 원천이며 아내의 퇴직 전까지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려 한다.

그의 수동성은 호두에서도 드러난다.

윤주의 아내는 그에게 호두를 까라 지시한다.

호두가 뇌 모양이라 머리에 좋다는 그의 읊조림과 함께 호두를 깨는 모습은, 그가 스스로 주체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양심 회복의 기회 역시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아내가 선물해준 푸들로 인해 기회를 얻지만 그는 개를 잃어버리며 기회를 박탈당한다.

사라진 양심(개)는 또 타인에 의해 구원 받게 된다.

현남이 몸을 던져가며 그의 양심을 구해낸 것.

그러나 그렇게 구한 양심의 소지자가 강아지 실종 사건의 진범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매력이다.

IMF와 규칙 비준수

주목해야 할 점은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IMF 시절의 사회 혼란과 연결된다.

IMF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국가 주도형, 조직 중심형 사회였다.

기존의 규율을 지킨다면 성공가도는 보장되어 있었기에 규범에 대한 준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부는 실패하지 않으며 직장이 자신을 책임질 것이라는 강한 신뢰가 형성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IMF 이후 이러한 신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부 또한 틀릴 수 있으며 직장은 더 이상 자신을 책임져주지 못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규범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한 계층은 중산층이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중산층이 모여 사는 아파트 단지라는 점 역시 이러한 시대상과 분리해서 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개를 키우지 않는 것이 규칙 아래, 아파트 내에서 개를 죽이는 윤주의 행위는 일종의 정의 집행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반대로 개를 구하는 현남은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지만, 정작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이 아파트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볼 수 있다.

선과 악

영화는 이처럼 선악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든다.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혹해 보이는 변경비 역시 사실 죽은 개 혹은 버려진 개를 처리했을 뿐이다.

부랑자 최씨 또한 개의 주인이 없다 생각해 먹으려 한 것이지, 주인이 있다면 돌려줄 용의도, 주인이 없다면 함께 나눠먹을 용의도 있는 선한 인물이다.

윤주 역시 뇌물을 내기까지 갈등하고, 그 돈의 일부를 비록 죄의식 때문이었다 해도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이에게 적선하는 선행을 보여준다.

즉 이 영화는 절대적인 윤리적 기준 없이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을 유쾌하게 풀어낸 블랙 코미디극이다.

명료한 윤리적 기준이 없기 때문일까.

영화는 나름의 정의를 실천한 현남에게 보상을 주긴 한다.

그러나 그 보상은 고작 무말랭이다.

직장을 잃은 대가라 생각하면 조금 더 초라해진다.

작품은 선의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내내 선의가 좌절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한 현남에게 사람들은 길 막지 말라며 무시하지만, 윤주가 적선한 2만원에는 90도로 인사한다.

양심을 버린 윤주는 결국 교수가 되었지만, 양심을 지킨 현남이 얻은 것은 무말랭이뿐이라는 사실 역시 그러하다.

영화는 숲을 바라보는 윤주의 모습과 함께 시작한다.

교수직에 관해 이야기하는 전화 속에서 그는 마치 숲을 지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도 그는 다시 창밖의 숲을 바라본다.

그러나 학생이 수업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커튼을 내리고 다시 교단으로 향하며  결국 숲을 등진다.

반면 바로 다음 장면에서 현남과 친구는 산을 오르고 있다.

영화는 이 장면과 함께 끝이 난다.

 

 

이 장면은 윤주와 현남을 대비시키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아내가 개를 선물하며 양심의 복귀를 시도했지만 결국 윤주는 양심과 정의를 등졌다. 반대로 현남은 직장도 잃고 TV의 주목도 받지 못하지만 여전히 정의를 쫓는다.

사실, 현남의 친구인 윤장미 그녀가 승리자 아닐까.

직장을 잃지도, 양심을 저버리지도 않은 개인 사업체 운영자.

숲을 거닐지만 잃은 것은 전혀 없는, 사실 이 영화는 자영업은 승리한다는 말이 하고 싶었을지도.

(심지어 근무태만에 가게에 있는 담배를 허구한 날 빼서 태운다)

 

노란 옷을 입은 소시민들의 정의를 응원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에서는 묘한 따스함이 느껴진다.

때로는 허황되고 우스꽝스럽더라도, 끝까지 양심과 정의를 붙들려는 이들의 용기를 영화는 조용히 응원하고 있는 듯하다.

상단베너

You May Also Like...

크라잉넛-리뷰

“사회 풍자” 라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예술가들에게 활용하기 좋은 주제로 사용되어 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고전 문학에는 다양한 사회

본문보기 »
error: 콘텐츠가 보호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