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너한테 안 쪽팔리려고 새끼야 너 하나 잘 키워보자고
365일 이디서(여기서) 이 피비린내 맡아가며 돼지 똥창 씻어 가며 죽어라 산 죄밖에 언.(없어)”
– <우리들의 블루스> 8화 中 –
‘인권’이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시장에서 순댓국을 파는 이유는 단 하나, 아들 ‘현’ 때문이다. 자식에게 쪽팔리게 살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검은돈 대신 순댓국을 팔아 모은 꼬깃꼬깃한 지폐들로 ‘현’을 키웠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권’을 바꿀 수 있었을까. 자식이란 무엇이기에, 부모는 자식 앞에서 이토록 결백해지고자 하는 것일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의 세계가 되는 일이다. ‘나’ 자신이 누군가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 오면, 부모는 ‘나’라는 세계를 재정비하게 된다. 작고 여린 자신의 아이만큼은 깨끗하고 안전한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까지 본인의 삶이 난잡하고 더러웠을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식이 자기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 자식이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자식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세계가 되어주기 위하여 ‘죽어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자식은 부모가 만들어 놓은 그 안온한 세계 속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극 중 ‘영주’와 그녀의 아버지 ‘호식’, ‘현’과 그의 아버지 ‘인권’이 겪는 갈등은 이러한 것이다. ‘영주’와 ‘현’의 이야기는 ‘미성년자의 임신’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하지만 작품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두 사람의 선택을 부모인 ‘인권’과 ‘호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이다.
방식은 다를지라도,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온 ‘인권’과 ‘호식’에게 ‘영주’의 임신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자식만은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며 이제껏 몸을 갈아 키워놨더니, 갑자기 시궁창에 빠지기 직전이 된 것이다.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이 눈에 훤한 길로 가려 하니 부모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런데 ‘영주’와 ‘현’의 생각은 다르다. 물론 두 사람에게도 ‘영주’의 임신은 재앙과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믿었고, 서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내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책상도 없는 허름한 여관방에서도 책을 꺼냈고, ‘현’은 학교를 그만 두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두 사람이 감당하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 높고 매서웠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허락이 아닌 ‘도움’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온전히 두 사람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임신 중단을 하려 했던 두 사람이 아이를 낳기로 선택하게 된 데에는 사실 많은 외부적인 요인이 개입되어 있다. 두 사람의 선택은 성·임신에 관한 교육 및 제도의 미흡함,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 인터넷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정보 접근의 제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드라마가 방영된 지 약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임신 중지와 관련한 제도적인 공백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다.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오면, 굳건했던 ‘인권’과 ‘호식’의 마음의 벽을 허문 것은 ‘영주’와 ‘현’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사과가 아닌, 그 과정에서 내버린 상처에 대한 사과. ‘영주’와 ‘현’은 부모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 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인권’과 ‘호식’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집합을 남겨두는 일이 아닐지 생각한다. 서로가 가진 세계의 모양이 달라져도, 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를 낳을지라도, 세계 간의 교집합을 남겨두는 일 말이다.




